BGM :♭ THORNAPPLE/아지랑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그러면 나를 키운 건 뭘까. 걔는 어머니에 대한 열등감이라 했다. 열등감. 만나본 적 없는 주변인들에 대한 열등감. 나는 기가 막히게 열등감을 따라오는 패배감과 자괴감에 더 지배당했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는데 열심히도 하지 않는 나. 동네에 있는 수학 학원은 다 다녀 놓고서도 수학을 포기한 나. 밑 빠진 독이었던 나. 개미 투자자들을 덮친 악재 같은 나. 그게 나를 키웠던가. 그 시기를 또 분수에 맞지 않는 비용을 치르며 빠져나왔다.
힘든 시기를 벗어나니 그 사이에 땅이 제법 말랐더라. 그래서 단단하게 굳어 있더라. 걷고 뛸 수 있는 땅은 되더라. 그런 배움이 나에게도 있기는 했다. 근데 그게 나를 키웠던가. 스스로를 좀먹은 흙의 양을 재보면 쌤쌤이지 않을까. 나는 그때의 내가 조금 불쌍하거든.
그러면 또 걔가 생각난다. 걘 좀 우산을 씌어주기보다는 같이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었다. 나 자신에 관한 열등감에서 벗어났다고, 그러니까 일종의 해방을 맞이했어도 개인이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오직 다음 전투의 승리만을 떠올리며 맹목적으로 살아온 어떤 군인에게 종전 소식이 마냥 기쁘기만 하지 않았던 것처럼. 해방감이 평등하게 행복을 물어다 주는 제비는 아니었다.
나는 그때 걔를 만났고 재미를 좀 보다가 그런 나를 좋아하고 말았다. 문제는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그건 아주 큰 사건이었다. 무교인 나로서는 예수의 탄생에 비할 만했다. 2막이 열렸고 시간이 기원후로 진행되었다. 내가 걔만 좋아했다면, 나는 조금 덜 슬펐을까?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쉽게 걔를 놓아주었을까?
나를 키운 건, 그리고 팔 할 씩이나 차지하는 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팔 할 씩이나? 걔나 나의 팔 할 씩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녹음된 내 목소리 듣는 것처럼 불쾌하다. 왜냐하면 지금 인생이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돼서. 나는 좀 내 인생을 자랑하고 싶다. 그게 꼭 자격 요건 같다. 걔를 내 입에 담을 수 있는. 그런, 뭐 최소 요건. 그런 자격들.
겨울이 되니까, 아니 무더위가 급격히 식으니까, 아니 봄에 꽃이 피니까, 아니. 그냥 그 겨울부터 주욱 그게 나를 옭아맨다. 내가 설치한 덫에 내가 발목을 넣고 다시 해체하고 치료하고 또다시 설치하고 잡히고 해체하고 치료하고. 그때의 나 같다. 근데 이건 열등감이 아니거든. 이건 뭘까. 이게 나를 키울까. 키우진 못해도 또 배움이 있을까.
/2018.12.01. 20:55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죄책감이다.
/2019.05.16. 19:56